지난 달, 영국의 UCL(University College London)을 졸업하거나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 편지(DM) 하나가 날라옵니다. 

편지 봉투 앞면에는 UCL 창립 당시 발기인 멤버였던 제러미 벤덤의 사진과 함께 "러미라면 무엇을 했을까요?"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봉투를 열면, "제러미 벤덤의 머리가 동봉되어 있습니다.(네, 정말로요)"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제러미 벤덤의 얼굴이 그려진 종이 전등갓이 봉투 안에 들어 있습니다! 전등갓을 펼치면 정말 머리 형상이 되는군요.  

             

이 편지는 'UCL이 계속해서 급진적인 사상을 널리 퍼뜨릴 수 있도록' UCL 졸업생과 재학생들에게 £100달러 기부 요청을 하기 위해 기획된 DM 마케팅입니다. 대체 왜 UCL은 제러미 벤담의 머리(전등갓)를 학생들에게 보냈을까요? 

UCL은 1826년 공리주의를 설파한 제러미 벤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설립한 영국 최초의 민간대학(현재는 국립대)입니다. 당시에 제러미 벤담은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주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기부 요청을 하기도 했는데요, 학생과 교수들은 지난 180여년 간 학교에 뿌리내린 그의 사상과 전통에 대한 자긍심, 그리고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 지난 2002년 임페리얼 칼리지와의 통합 논의가 있었을 때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 학생 사이에 결속력과 자긍심이 더 단단해졌다고 하네요. 


출처: UCL 홈페이지

그러나 여전히 궁금증이 듭니다. 왜 하필이면 벤담의 '머리'를 마케팅 수단으로 썼을까? 여기에는 참으로 흥미로운 사연이 있습니다. 

제러미 벤담은 당시에 괴짜 경제학자로 널리 알려진만큼 자신이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상당히 독특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이 유용하게 쓰이길 원했는데, 그래서 죽음 직전에 친구이자 과학자인 토머스 사우스우드 스미스 박사에게 시신을 기증하겠다고 밝히며 과학강의에 시신을 사용하고 난 후에는 골격과 머리뼈를 신중하게 계획해서 잘 보존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스미스 박사는 그의 시신을 해부하는 자리에 고인의 친구들을 초청하고 실제로 그의 시신 앞에서 강의를 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머리를 제외한 시신의 골격을 재구성하여 미이라로 만든 뒤 머리 자리에는 밀랍 모형을 붙여 몇 년 후 UCL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따로 떼어진 머리 부분의 미이라와 함께 말이죠. UCL은 미이라와 벤덤의 머리를 나무로 된 부스에 넣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합니다. 

그런데 1975년, UCL의 라이벌 학교의 학생들이 그의 머리 시신을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무사히 그의 머리를 되찾긴 했지만 UCL은 보존의 안정성에 대한 문제, 그리고 머리를 전시하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표하는 여론을 의식해 몸과 분리되어 지하 창고에서 보관 중이라고 합니다.  

'제러미 벤담 머리 전등갓'은 이런 흥미로운 사연으로부터 기획되었습니다. 이제 축축한 지하 창고 밖을 더이상 빠져나올 수 없는 그의 머리를 전등갓으로 형상화해 널리 배포함으로써 학생들로 하여금 그의 철학과 가치를 다시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지요.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서, "제러미라면 무엇을 했을까요?" 만약 제러미라면 지하실과 부스 밖으로 나와 UCL이 흔들림 없이 전통과 철학을 지킬 수 있도록, 그리고 그의 머리가 제자리에 돌아갈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UCL을 더 많이 지지하고 응원할 것을 부지런히 설파하고 다니지 않았을까요? 그것이 UCL이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세지입니다. 
 
'제러미 벤담 머리 전등갓' DM 마케팅은 4주만에 이전의 그 어떤 DM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보였다고 합니다. SNS을 통해 전등갓 이미지와 그 흥미로운 스토리가 널리 확산된 것은 물론이구요.


이제 모금 방법으로 DM은 한물 간 방식이라는 평가들이 많이 있죠? 불특정 다수에 대한 다량 배포 방식으로는 그 효과가 1~2%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구요. 그러나 타겟층을 분명히 하고 크리에이티브한 방식을 고민한다면 DM도 얼마든지 좋은 모금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 이번 UCL의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네요.

이 DM 마케팅에 가담한 Bluefrog Creative블로그를 통해 이번 일을 통해 배운 점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UCL의 담당자는 타겟층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제러미 벤담이 학생들의 UCL에 대한 기억과 급진적 사상의 전통을 일깨워 줄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모금은 단지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기부자들을 당신과 연결시키고 그들을 기쁘게 할지 고려해야 한다. 
 만약 용감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면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시도해봐라. 이번에 우리는 학교 잡지 한 구석에 제러미 머리 관련 글을 실었다. 누구에게도 불평을 듣지 못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전등갓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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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삼한 컷트핏 연구교육신혜정
손가락 끝까지 전해지는 강렬한 떨림을 따라 여행하듯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영리단체들의 멋진 성장을 돕고 싶다는 꿈을 안고 아름다운재단에 흘러왔습니다.
디자인, 혁신, 소셜네트워크, 고양이, 글과 그림, 창조적인 모든 것 좋아해요 :)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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